영적비밀·원리

인종차별주의자

바나바스 2017. 6. 29. 03:23

인종차별

 

*성령은 예수를 증거 하기 위해 오셨다. 성령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에 당신을 나타내실 때 우리는 흑백의 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들의 컬러풀한 영광만을 보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보내신바 된 것은 우리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보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 말은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현재의 모습대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보혈을 통해서 보시며 장래에 되어 질 모습, 즉 예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습대로 바라보신다. 아멘.

 

*우리도 서로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해야한다. 인종차별주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최종적인 악의 요새들 가운데 하나이며 악이 통제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항상 연합을 가져올 것이며 주님의 집을 진실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 혹은 문자적으로 모든 인간, 인종, 집단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게 할 것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틀림없이 자유가 있으며, 그분이 주님(주인)이신 곳에는 연합이 있기 마련이다.

/ 자유가 없다면 주의영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연합이 없다는 것은 주님이, 그 모임에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 예배에 자유 함이 없다는 것은

/ 모임에 연합이 없다는 것은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 동일한 모습으로 보인다. 예수의 피는 분명 모든 피부색의 경계를 씻어 내신다

모든 죄의 높 낮이를 덮어 버리신다. 교회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존재할 때는 항상 다문화적일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들과 함께 먹지 않은 위선에 대해 단호하게 베드로와 맞서야만 했다. 하나님 앞에서 인종간의 평등은 복음의 근본적인 정신이다. 심지어 베드로 까지도 교회와 인간을 분열시키려고 하는 그 기본적인 기만에 빠진 사실로 인해 "면책 받았다" 인종차별주의의 극복은 이제 거의 모든 기독교의 범위 내에서 주된 목표가 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 우리시대의 가장 긍정적인 표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님은 다양성을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눈송이 모든 나무와 나뭇잎사귀까지도 서로 다르게 만드신 "복 되신 창조주" 이시다. 이 모든 다양성 속에서 창조의 위대한 경이로움 가운데 하나는 피조세계 전체 에서 발견되는 조화와 균형이다모든 동물과 식물의 모든 종이 전체를 움직여 가도록 하는 일에 있어서 각기 자기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자기 속성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서로 다른 인종들과 문화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그분을 온전히 반영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서로가 같이 모여 하나가 되어야 그분의 아름다움이 된다. 그분의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하는 집" 이 되어야 한다.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흑인들을 종으로 또는 일꾼으로 소나 말처럼 부리는 것을 보고 또 그들의 행동과 생활을 보고 "흑인들이 인간일까 과연 그들에게 영혼이 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살았다고 하는 남아공 어느 백인 크리스챤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며 함께 선교훈련을 받은 흑인들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가난한 백인과 부자 흑인을 또 두시고 흑백은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며 서로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 하시며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 남아공의 마지막 미션은 흑백과 인종과 종족들의 연합과 사랑과 하나 됨이다.

 

아이들도 학교생활의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들이 많고, 교통운전 중 조그만 실수에도 백인들의 손가락질을 해 댄다. 내가 그들과 같은 백인 이었다면 웃고 지나칠 사람들이...

지금도 들리는 소리들. 짜이나~ 니하오~ 그래 나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다.

쭝국인도, 인도인도 싫어한다. 백인은 더 싫어한다.

흑인만 좋아한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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