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비밀·원리

영적 교통

바나바스 2017. 7. 1. 01:23

영적 교통

여호와의 군대장관


*영적인 교통은 마음과 생각이 합치된 순수한 교신이며, 너무 순수해 오해가 없다영적으로 순수해지고 

거룩해지면 말을 안 해도 한 성령으로 인해서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면 내 마음이 동일하게 주님의 마음이 되고 주님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주님과 함께 교통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그분과 교통을 즐기는 것보다 더 즐기고 계심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교통이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인간의 언어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으로 교통할 수 있도록 창조 하셨지만, 우리의 타락과 바벨탑 사건 때문에 우리는 이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이 능력을 되찾기까지 우리가 창조된 본래의 모습으로 될 수 없으며,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만회 할 수 있다.

 

*나는 아담의 범죄가 그 자신을 하나님께로 부터 숨기게 만들었을 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원래 창조의 모습에서 가장 끔찍한 변형과 또한 그의 지적 영적 능력들의 심각한 감소의 시작 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능력은 오직 우리가 '숨는 것' 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자신을 하나님께 또 우리 각자에게 열고, 완전히 투명해질 때(회개하여 죄 사함 받을 때)에야만 회복 될 수 있다


*우리가 '숨길 수 없는 얼굴' 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 볼 때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그 베일들은 우리가 자신을 감추려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숨었었지만 이제 나와서 하나님께 열고 투명해져야 한다. 자신을 열고(죄인 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투명해져야 한다.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추구이시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추구는 아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임재 안에 있을 때에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내가 숨은 곳에서 나를 데리고 나오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께서 얼마나 자기 백성들과 하나가 되기를 열망하고 계시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심판 전체를 통하여 내내 우리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보는 것보다 그것을 그분과의 연합에서 볼 수 있도록 그분은 우리의 시선을 이끄신다. 우리는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분해, 분석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통합해서, 연합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5:13~15)

/ "둘 다 아니오 나는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오"


*내가 그분을 찾는 것보다 주님께서 더 많이 나를 찾고 계신다. 그분의 심판은 나를 자유케 했다. 그리고 그분의 세상에 대한 심판은 세상을 자유케 할 것이다. 그렇다 선하냐 악하냐를 논하기 이전에, 파악해 보려 하기 이전에, 그분과 먼저 연합하라 그러면 저절로 보이게 될 것이다. "전쟁이 나겠느냐 안 나겠느냐"  논하기 이전에 "휴거가 언제 일어 나느냐"  논하기 전에 그분께 먼저 나아가라

 

*빛 가운데로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진리들을 알고 순종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며 숨으려는 충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나 다른 누구로부터 더 이상 숨지 않는 것이다. 영적인 벌거벗음은 곧 자유함을 의미하며, 알몸 된 자에게 알몸을 드러내기가 더 쉽다. 커밍아웃은 자기의 자유함을 위한 행위일 뿐이다


*나의 영적인 벌거벗음을, 영적인 알몸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과 아담의 교통과 같은 그런 친밀감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그 친밀감은 자주 만나고 이런저런 대화를 할 때만 생긴다. 일방적 대화가 아닌 쌍방의 대화이다.

 

당신은 얼마나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가?

그래서 그 친밀함을 얼마나 누리는가?

형제여~ 기름부음의 대가를 지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