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예배·선교

직분은 종의 멍에

바나바스 2017. 7. 2. 04:08

직분은 종의 멍에

직분과 정체성


*선교사라는 직분은 내가 선교사라고 생각하는 정도만큼, 즉 선교사란 누구이며, 선교란 무엇인가를 알고, 믿고 생각하는 정도만큼만 나를 성숙시켜 왔지만, 또 반대로 나를 선교사란 직분 이내로 제한시켜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처음 선교로 왔을 때 선교사란 직분 자체가 나를 종교적 의무감과 열심의 율법이 되어 나를 끌고 나가는 수동적이고 의무적인 사역으로(물론 열정을 주셔서 그나마 능동적인 흉내로 커버하긴 했지만)했던 선교초기의 사역들을, 지금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난 여정이 안타깝다. 뒤 돌아보면 늘 능동적으로 그분을 앞서 나가곤 했었다. 즉 혼의 힘으로 하려고 했었다. 내 안에 내주하신 성령의 힘으로 그분께 늘 수동적으로 순종하며 따랐어야 했는데 말이다.

 

*성령께서 나의 불감함과 불순종으로 인해 그런 방법으로 밖에 인도 하실 수밖에 없으셨다면야 어쩔 수 없이 나의 정체성이 나의 선교사란 직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선교사란 직분이 그 직분 자체를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그래서 종의 멍에를 진 그래서 불충한 예배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선교사이기 이전에 나의 정체성은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순종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데도, 아니 예배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 됨의 믿음이 확고해서 그 아들의 정체성이 나의 모든 삶의 베이스 가 또 이유와 동기가 되어야 하는데, 남들이 "선교사님" "선교사님" 하고 불러 주니까 선교사입네 하고 이미 뭔가를 내 힘으로 이룬 것처럼 생각하고, 내가 선교사로써 기본적으로 의무같이 행해야 할 것을 행하는 종이나 일꾼으로 선교 사역을 한다는 것은 그분도 원치 않으시는 것이다그것은 역시 사단의 속임인 종의 멍에이며 그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의 믿음의 달려갈 길이고 또한 선한 싸움의 하나 일 것이다.

 

*지금 많은 교회가 그분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교회가 조직과 시스템의 세상적인 방법으로 인해 출처가 모호한 직분을 권위인 양 남, 오용 하는 일로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의 수치가 드러나고 리더의 치욕이 발생 하는게 아닌가 한다.

 

*사실 중요한 것은 직분이나 그분이 주신 우리의 어떤 기능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다나의 경우도 결국 선교사란 직분을 사용하셔서 나를 아들로, 예배자(그분이 원하시는)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가운데 나의 삶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체성은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사는가' 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 직분들이 그 명칭들이 왜 단지 그 직분과 명칭에 지나지 않는가는, 우리가 심판대에 섰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누구누구 목사야, 누구누구 선교사야, 장로야, 집사야, 라는 명칭을 부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알지만

/ 착하고 충성된 종아(미션에 따른 호칭),

/ 사랑하는 아들아,

/ 나의 신부야 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이 오시면 없어질 그런 역할을 지칭하는 그런 직분의 이름들로 부르시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나의 가치는, 나의 정체성은 나의 직업에 귀천에 의하고, 크리스천인 나의 가치는 나의 사역의 종류 즉 직분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세상적이고 조직적인 계급사회에서 성장한 사고구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발상일 뿐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자(직분)가 필요 했기에 아담을 지으시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아담과 동산을 거닐기 위해(직임) 아담을 낳으셨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십자가의 은혜로 인한 우리의 삶이 그분 앞에 사랑과 순종이 될 때, 그분께서 죽기까지 사랑한 우리의 참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번에 어느 한인 교회에 장로 권사 취임식이 있었는데 초대받은 한 현지인 백인목사의 황당해 함을 볼 수가 있었다. 직분이 왜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그것은 교회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이의 없는 마지못한 축하만하고 내려갔다.


*더 황당한 일은 다른 한인교회 목사의 권면은 그들을 장로나 권사의 직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종의 굴레를 씌우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분간 안 되는 권면사로 나를 또한 당황하게 했다. 우리는 그분께 받은 많은 직임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에다 어떤 명칭(직분 명)들을 붙이고 거기에 너무 많은 영향력과 지위와 의미와 정체성을 두는 것 같다.


*어쩌면 그런 그 직분들이 내겐 일종의 우상처럼(종의 멍에)보일 때도 있다. 평신도란 직분이나 직임(하나님의 사명)을 받기 전의 명칭이라고 애써 위로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다성경에서의 명칭은 우리의 기능을 규정지었지 존재를 규정지은 것은 아니라 본다마찬가지로 영적권위는 명칭과 직분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그분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직분과 명칭을 받을 수 는 있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예배자이다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하여 그분과 친밀한 아들, 더 나아가 친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체성의 직임은 아들, 친구, 신부일 뿐이다.

 

*어떤 직분이 우리를 그 직분의 한계까지 데려갈 수는 있지만, 우리는 그 직분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르심의 자리와 위치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붙인 직분이고 명칭일 뿐이지 그분께서 부르시는 이름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당신의 

직분은 무엇이고 

직임은 무엇이고 

정체성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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