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구원

물 세례 / 성령 세례 / 불 세례

바나바스 2017. 8. 16. 00:22


많은 사람들이 이 세가지의 세례에 대해 궁굼해하고 의아해 한다. 뭔 차이가 있지?

사실 신학적(인간이 본 하나님)으로는 도저히 해석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해 보지 않고 인간의 이해로는 사변적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도 이것을 말씀을 공부하다가, 묵상 하다가 받은 계시가 아니고, 선교현장에서 사역하다가 받은 것이기에 사실 말로나 글로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세례의 원리와 메카니즘을 안다면 변증론적인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도움이 될 법하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 되어지기 때문에 항상 이부분에서 성령의 역사를 말로 표현 한다는게 늘 한계를 가져왔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2:13,14)


성령에 관한 많은 글에 이 세가지 세례에 대한 일부분 혹은 한부분을 이미 기록했지만, 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하려 한다.


첫째, '물 세례'(침례)란  - 물 세례, 이부분은 '물 침례' 라고 할수 있는 부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종 된 땅을 떠나 다른 땅으로 갈때 지나야 했던 홍해도하(홍해 세례) 사건을 얘기한다. 즉 우리가 세상에 속아 종된 생활을 하다가 구원자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그 해방시킨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님(유월절 어린양)이 누구인지를 어떤 분인지를 알고, 인정하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는 의식으로 물 세례를 받는다.


사실 이부분은 첫 단추인데 변질된 다른 복음으로 인한 의례적, 행사적 세례로 인하여 첫 단추가 잘못 뀌어져(대부분 회개가 빠짐) 이후의 성령세례나 불세례는 물론 아직까지 물 세례도 통과하지 못한 많은 유, 무형교회들을 만날수가 있다. (예: 군장병들 단체세례, 유아세례)

  

둘째, '성령세례' 는 가장 중요한 세례라 할수 있다. 

왜냐하면 공개적 또는 개인적으로 물 세례를 안 받았다 하더라도, 그분의 은총(성령의 마음)으로 우리의 의지에 상관없이 들어 오실수도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부터는 그분의 선택이 가미되는 부분이다.

중요한 또 한가지 이유는 그분이 살리는 영으로 우리안에 들어오시는 것이기에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성령세례가 없으면, 성령이 내주하지 아니하시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찬양 했었어야 했다. 그러면 그들은 가나안에 한 10여일 만에 들어 갈 수도 있었다. 왜 애굽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으로 40년을 보냈을까?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심지어 하나님은 화가나서 그들과 함께가지 않으시겠다고 모세에게 하소연 하시기도 했다. 그 겸손한 모세가 화가나서 바위를 내리치게 까지했으며,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시킨 죄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까지 했다.  지금 조국 교회의 실상과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사십년동안 광야에서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기적과 이적으로 보이시고 믿으라 했건만 결국 그들은 성령세례도 받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어야 했다. 지금 조국교회도 성령이 없이 죽어가는 교인들이 예상외로 많다.


물 침례를 받고나서 

/ 죄에서 구원하시고, 

/ 용서하시고, 

/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신 예수님께 

회개와 감사와 감격의 마음을 올려(찬양) 드리면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1:5)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텐데... 쩝

그렇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물 세례의 고백이 '참 고백' 이었는지 그냥 '립 서비스' 에 지나지 않았는지 확인 하시는 시간이 필요하셨고, 회개(자신이 주인된 삶을 살아왔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회한의 극한 송구함)와 그것의 진실된 고백과 "예수님이 주인된 삶을 살겠습니다." 라는 결단을 확인 하시고 예수님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안에 주인으로 내주하시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그러니까 성령의 인침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시는 분(임마누엘) 인 것이다. 
성령은 살리는 영으로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천국에 갈수 없다. 아니 천국은 둘째치고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갈 수 조차 없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삶(어떤 형태의 삶이라도)의 그 한 조각이라도 당신의 혼의 의지와 능력이라 생각 한다면 역시 대적에게 속고있는 것이다. 그분은 6000년 인류 역사속에 단 한번도 우리를, 당신을 떠나신 적이 없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고후1:22)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세째, '불 세례' 는 내주하신 성령이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거룩의 파워인데 그 거룩의 파워는 성경에서 항상 '불' 로 나타났으며 
그 불은 또한 더러운 것, 악한 것, 어두운 것, 약한 것 등을 태우는 속성(자연적 - 그분의 어떤 의도가 아닌 성품, 속성)이 있다. 물론 태워 질때는 어떤 희생과 내려놓음의 고통과 아픔이 동반된다. 
그렇지만 그 영적 정화(카타르시스 - catharsis)는 치유(악한 영이 묶임)로 인한 희열과 감동을 가져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일 세대 중에는 성령세례를 받은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그리고 2세대들과 함께 광야를 졸업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그 여덟명의 정탐꾼의 말은 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단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뿐,  구원의 하나님을 몰랐을 뿐, 뭐 뿐 뿐 할수 있는 사항은 아니지만...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예수님의 대속의 용서)을 무시(불신 - 가치 없게 여김)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으면 그 장대한 거인들이 메뚜기보다 더 작게 보이기 시작 한다는 것이다.
나를 압도하는 현실과 상황과 환경의 큰 파도같은 문제들이 메뚜기처럼, 장난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어쨋든 우리안에 내주하신 성령은 우리에게 선택권(이미 에덴동산에서 주신)을 주시며, 늘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마음을 통달하시는 그분이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마음을 선택하기를 기다리시지만, 강요하시거나 
밀어 부치시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시는, 너무사랑하셔서 시기까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선택(악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을 선으로 바꾸시며 늘 우리를 축복하신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분의 원함(Wish, Desire)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리더 여호수아와 2세대들은 하나님을 알고 충분히 경험했기에 가나안 땅에 있는 일곱족속(*'일곱영과 일곱귀신' 참조)을 진멸해 나간다.  여리고성, 아이성 전투 등 그분은 그들이 늘 순종하고 그 능력으로 이기기를(성령의 능력으로)원하시는 소원함이 있으셨다. 

교회가 성령께 늘 묻고 교제하고 순종하면 계속 그렇게 성령하나님을  
/ 인정하고, 
/ 존중하고, 
/ 사랑하고, 
/ 순종한다(예배)면 그분은 그분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선택의지를 본의 아니게 깨실 필요없이, 
'우리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없이' 그분을 우리 몸과 우리 혼 즉 심령(마음)과 눈, 입과 손, 발을 통해 나타나시고 드러나시기 시작 하신다.

이런 현상이 소위 말해서 성령충만이 되는 것이다.  
이제 성령은 
/ 당신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 당신의 의사를 더 이상 물으시지 않는다 
/ 우리의 눈치를 더 이상 보시지 않는다. 
아~ 이 얼마나 인격적이신 분인지...  
당신은 이 따뜻하고 인격적이신 분을 혹시 오해하고 있지 않았는가?  

성령께서 마음대로 성령이 행하고자 하시는 대로 당신을 통해 일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불 세례' 이며, 그분이 원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형통' 의 단계인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당근  '노 푸라부우우움! 이다. 

우리는 그분의 행하심에 그냥 우리의 영, 혼, 육을 맡기면 된다. 
바야흐로 예수님의 쉽고 가벼은 멍에를 지게되는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주시고자 했던 그분의 그 멍에를 이 땅에서 단 한번이라도 
체험하고 예수님을 대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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