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구원

'관용' 마지막 관문?

바나바스 2018. 9. 28. 16:12


주께서 가까우신 날에

하나님께서 '관용' 이란 단어를 주시고 

깊이 묵상, 돌아보게 하셨다.


내가 지금 가져야 할 마음이라고...

성령의 열매에도 없는 말씀을... 

마지막 성령의 열매인 절제를 넘어서라 하신다.


빌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여기서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에피에이케스’은 

손해나 역경을 당해도 쉽게 동요되거나 넘어지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영적인 인내’를 가리킨다(Calvin). 또한 이것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Kent).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 심지어 자신을 핍박(逼迫)하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은 성도들이 관용의 태도로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퀴리오스 엥귀스’은 주의 재림의 소원을 나타내는 ‘마라나 타’(’주여 오시옵소서’, 계 22:20)의 변형 구절이다(Martin). 바울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와 오는 것을 믿는이상 모든 핍박을 인내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이라고 권면하고 있다(약 5:7-9).


그러면 주께서 가까우시면 가까울수록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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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더 다른 내용과 뜻들입니다.

참고하십시오.


관용 (寬容) - 너그러울 관(寬) 얼굴 용(容) / tolerance

일반적으로는 남의 허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을 뜻하고 

넓게는 자신과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의 인격권과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며 

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미덕 중에 하나이다.

관용을 용서의 전단계로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꼭 가져야 하는 마음이 된다.

  

세상의 좁은 의미에서 관용이란 '죄를 합리화하여 없던 일로 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저지른 사람이 죗값을 치루고 반성하여 개과천선하면 증오를 거두고 새출발할 수 있도록 

용서하는 것 다시 말해, 사람이 죄를 지었음에 따라 치뤄야 할 법적, 도덕적 문책까지 사하는 것은 아니다

관용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알며 참된 반성과 함께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진심어린 사죄와 져야 할 책임을 다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적으로는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하는 무조건적 용서를 뜻한다.

 

그리고 관용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즉 영적으로 '죄인 마귀는 원수로 대적하되 그 마귀에 속은 영혼은 사랑하라 라고 하는 말과 같다. 

죄와 사람을 일치시켜 악인으로 낙인을 찍고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말고죄인 마귀가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가면 사람에게서 미움과 증오를 거두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이러저러한 잘못을 저지르며 성장하기 때문에 발호하는 

개념의 단어라고 할수 있다.

 

'관용(寬容)'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Tolerance''Generosity'라는 단어의 

Tolerance의 어원인 라틴 어 Tolerantia는 견디기 힘든 것을 참아 낸다는 '인내'의 의미가 강하고

Generosity의 어원인 Generōsus는 엉뚱하게도 '고귀한 출신'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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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원문적으로 해석하면 

관용 - ἐπιεικής - 에피에이케스 - epieike-s

온순한, 온화한, 순한, 온유한, 친절한, 참을성 있는 의 뜻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형용사 에피에이케스와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에이코스(알맞는, 어울리는, 적절한, 온당한)에서 유래하였거나 아니면 에이코(굴복하다, 양보하다)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며,호머 시대 이래로 '온당한 알맞는 생활방식'이라는 의미로, 투키디데스 이래로 '관용, 인내, 온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피에이케스 및 그 어군의 단어들은 본래 제멋대로 방자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균형 잡히고, 지성적이며 잘 어울리는 외모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말이었다. 후에 그것은 법률의 적용에 있어서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의 공민권을 포함한 모든 공민권이 단호히 확립되어야 한다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정의의 엄격성을 그 법률적 표현 및 제권리와 함께 융통성 있게 할 용의가 있는, 인정 있고 사려 깊은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 에피에이케스 단어군과 프라위스(G4239)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l0회 등장하며, 에피에이케스 및 그 형용사형은 6회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세상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비심(삼상 12:22; 시 86:5; 지혜서 12:18)과 왕의 행동(마카베오이서 9:27), 선지자(왕하 6:3) 및 경건한 자(지혜서 2:19)의 행동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에피에이케스는 5회 나오며, 에피에이케이아는 2회 나온다. 약 3:17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목록에 나타난다: 에피에이케스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살 때 지켜야 할 규칙을 표현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딤전 3:3에서는 특히 감독들의 자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감독은…오직 관용하며". 벧전 2:18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종들의 주인에게 적용되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고후 1O: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에피에이케이아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태도를 표현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행 24:4에서 에피에이케이아는 총독 벨릭스 앞에서 유대인 변사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는 연설을 할 때 사용되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